인종차별 속에 스러져 간 영원불멸의 레이디 데이 (Lady day)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상념도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의 목석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노래하는 이의 음색이나 음성의 애절함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빌리 홀리데이, 그녀의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여간해서는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인생이 음성에 담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보컬이 들어간 재즈를 발라드 재즈로 분류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재즈에서 보컬이란 요소는 엄밀히 따지자면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재즈에서 보컬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 이들은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 등 여성 보컬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키운 그 배경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블루스, 재즈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잘 알겠지만 이 분야의 뮤지션들 중에는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워낙 많아 오히려 정상적인 생애를 보낸 사람 찾기가 훨씬 어렵다. 그런 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특히 더 기구했다. (하긴 빌리 홀리데이 못지 않게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에디뜨 비아프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녀의 삶은 운명적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불과 44살에 인생을 마감한 그녀의 일생 중 거의 40여년은 굶주림과 학대, 인종 차별의 두터운 벽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홀대받는 흑인 아기의 출생
빌리 홀리데이는 1910년대 슬럼가 출신 흑인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자랐다. 태어나면서 그녀에게 달라붙은 가난과 불행의 운명은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길까지 떠날 줄 몰랐다. 빌리 홀리데이는 1915년 4월 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일설에는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라고 하는 이도 있다)의 한 슬럼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전기 작가마다 각기 다르게 말하고 있을 만큼 정확하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인 클라렌스 홀리데이(Clarence Holiday)와 어머니인 새디 페이건(Sadie Fagan)이 나중에 정식으로 결혼했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둥 전기작가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이 말은 빌리 홀리데이의 삶이 처음부터 정상적인 가정의 출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뜻이 된다. 말콤 X의 자서전에도 있듯이 슬럼가의 흑인 어린이들이 보내는 어린 시절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런지 모르겠지만, 춘향이와 이
몽룡도 아닌 이 흑인 슬럼가의 두 청춘 남녀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빌리 홀리데이를 잉태하고 출산한다. 이 때 아버지는 16살, 어머니는 13살이었다. 정식 결혼도 없이 태어난 이 아기는 일단 어머니쪽 성을 따라 엘리노어(Eleanor) 페이건이라 불렀다. 그녀는 당시 교육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 대개가 그러하듯이 백인 가정의 흑인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신한 것이 들통나 그 마저 쫒겨나고 만다. 그러나 빌리의 아버지는 그녀를 팽개쳐두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유랑악단을 따라 떠나버리고 만다.
아버지가 없는 중에 빌리를 출산하기는 했지만 어린 빌리를 양욱할 능력이 없었던 빌리의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외가에 맡기고 일자리를 찾아 뉴욕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빌리 홀리데이 유년기의 상처는 평생을 두고 그녀를 괴롭혔다. 훗날 재즈 가수로 명성을 얻어 대중의 각광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평생을 두고 혼자 남겨지게 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사랑받지 못한다는 콤플렉스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두 번의 강간과 감옥 생활을 경험한 14살의 창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 아닌 고아 ,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사촌인 아이다와 아이다의 두 아이인 헨리, 엘시와 함께 살게 되었다. 사촌 아이다는 마치 신데렐라의 계모처럼 그녀를 매일 때리고 학대하였다고 한다. 비록 학대받는 괴로운 시절이긴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빌리에게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평소 빌리를 귀여워 해주던 할머니는 외손녀인 어린 빌리를 늘 품에 안고 재워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처럼 할머니의 품에서 잠든 빌리는 무거운 기척에 눌려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차갑게 굳어 버린 할머니는 어린 빌리의 목을 감싸안은 채 숨을 거두었고, 빌리는 할머니의 팔에 감기어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이 때의 충격으로 빌리는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린 빌리에게 잠시 평온한 시절이 찾아왔다. 어머니 새디가 필이라는 백인 남자와 재혼을 하며 그녀를 다시 데려간 것이다. 백인 아버지와 빌리의 관계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던지 빌리는 이 무렵을 그래도 행복한 시절로 기억했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행복을 원치 않았던지 이복 아버지와의 행복도 잠시 뿐이었다.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빌리는 어려서부터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고,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듣곤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축음기는 굉장한 사치품이었고 할렘에서 그런 축음기를 가질 수 있는 여자는 창녀밖에 없었다. 어린 빌리는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듣기 위해 아리스라는 창녀의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도와야 했다. 그녀 나이 열살이던 1925년 빌리는 마흔 살 가량의 백인 남자 딕크의 집에서 일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큰 상처를 입은 빌리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백인 남자를 처벌하지 않고, 어린 빌리를 불량소녀로 몰아 감화원에 보내고 만다.
감화원에 갇힌 어린 흑인 소녀 엘리노어 페이건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가 찾아와 빌리는 2년만에 간신히 감화원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더이상 다칠 수 없을 만큼 상처받고 난 뒤였다. 그러나 빌리의 고통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어떤 흑인 남자로부터의 성폭행이었다. 결국 빌리의 어머니는 그 해 여름 자신의 딸을 뉴욕으로 데려갔고, 어린 빌리의 정규교육은 이때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뉴욕에서의 생활이라고 해서 이 두 모녀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빌리는 뉴욕 할렘의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되었고, 그런 삶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풍족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떤 흑인의 강요된 성행위를 거부하다 결국 밀고당해 다시 경찰로 넘겨졌고 어린 빌리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두 차례의 철창행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빌리 홀리데이는 사창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하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도 불어닥친 경제 대공황은 이 두 모녀에게 더이상 벌집 같은 작은 방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두 모녀는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탄생
몹씨 추운 어느 겨울 밤. 밀린 방세를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날 쫓겨난다는 절박감을 안고 거리에 나선 빌리 홀리데이는 그저 발길 닿는 데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할렘가에 위치한 '포즈와 제리즈(Pod`s & Jerr's)라는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녀는 지배인을 만나 사정사정하여 댄서라고 속이고 일자리를 청했지만, 운수 사납게도 즉석 오디션에 통과해야만 했다. 춤이라고는 배워 본적도 없는 그녀가 오디션에 통과할리 만무했다. 노발대발한 지배인은 그녀를 당장 내쫓으려 했다. 그때 그녀를 가엾게 여긴 피아노 연주자가 말했다. "노래는 어때?" 엘리노어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홀 안이 쩌렁쩌렁하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노래라면 자신있어요.
피아니스트는 이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엘리노어의 노래는 시끌벅적한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훗날 그녀는 그 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꿈같은 정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자리에서는 술잔을 옆에 놓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밤 피아니스트와 반으로 나눈 그녀의 팁은 57달러나 되었다. 나이트클럽의 주급 18달러 짜리 가수가 되자 엘리노어 페이건에게는 새로운 예명이 필요해졌다. 그때 떠오른 이름이 예전부터 좋아하던 배우 빌리 도브였고, 거기에 아버지의 성을 따와 "빌리 홀리데이"라고 정했다.
영화 <코튼클럽>(Cotton club은 실존하는 클럽이었고 당대의 쟁쟁한 재즈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이나 대공황기를 다룬 미국영화들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가 거의 온몸을 드러낸 댄서들이 춤을 추고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 손님들의 무릎 위에 앉으며 팁을 받아 챙기는 장면이다. 그런데 빌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님이 던져주는 팁을 받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하는데, 허리를 숙이면 가슴이 다 드러나는 데다 추근대는 손님들이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빌리를 두고 동료들은 자기가 무슨 요조숙녀라도 되는 줄 아나봐 하고 놀려대며 부른 것이 '레이디(Lady)'의 시초였다. 어느날 그런 빌리의 모습을 보다 못한 어느 부자 손님이 빌리에게 떨어진 돈을 주워 직접 손에 쥐어주었고, 이후 빌리의 손님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레이디의 인기는 점차 높아졌고, 할렘의 여러 클럽에서 그녀를 필요로 했다.
이 시절 그녀는 언제나 머리에 크고 흰 치자꽃 한 송이를 꽃고 출연했는데, 죽는 날까지 계속된 이 버릇 때문에 머리카락에 꽂은 하얀 치자꽃은 '빌리 홀리데이의 전설'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하얀 치자꽃 레이디데이와 노래하는 검둥개
빌리 홀리데이는 나날이 명성을 얻어갔고, 할렘의 여러 클럽들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빌리 홀리데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벌어졌다. 음악평론가 존 하몬드가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존 하몬드는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일류 매니저인 조 그래이저를 그녀에게 소개했고 1933년 18세의 나이로 첫번째 음반을 취입하게 된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의 이 첫번째 앨범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존 하몬드는 1935년 빌리 홀리데이를 유명한 '테디 윌슨 악단'의 보컬리스트로 음반을 취입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이 두번째 레코드는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빌리에게 행운은 연속해서 다가왔다. 같은 해 그녀는 공작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의 보컬을 맡았고, 흑인 연예인이 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던 아폴로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자신의 첫 독집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는데 그 음반이 바로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CBS컬럼비아>였다. 이 시기의 그녀는 주로 '플레처 핸더슨 악단'과 함께 출연했다.
1937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빌리 홀리데이는 뉴욕에서 '카운트 베이시 악단(The Count Basie Bands)'과 공연하면서 테너 색소폰의 1인자인 레스터 영(Lester Young)을 만나게 된다. 서로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한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빠지고 만다.
빌리 홀리데이는 레스터를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의미를 담아 '프레즈'라고 불렀으며 레스터 역시 그런 그녀에게 '기품있는 숙녀 홀리데이'라는 뜻을 담아 '레이디데이'라고 불렀다. 이 애칭은 지금까지 빌리 홀리데이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아티 쇼(Artie Show - 음악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그는 그리 비중 있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당시 스윙 음악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당대에 큰 인기를 누린 백인 엔터테이너의 전형이었다.)가 그녀를 찾아와 보스턴 연주 여행에 함께 해줄 것을 제의했다. 흑인 여성 가수인 빌리 홀리데이와 백인 악사 13명을 한 무대에 세운다는 이 제안은 인종차별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회분위기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제의였다. '아티 쇼 악단'의 이런 순회 연주는 흥행에는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빌리 홀리데이는 순회 연주 기간 내내 심각한 인종차별의 벽을 느껴야만 했다.
이들의 연주는 재즈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미국 남부의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백인 악단이 흑인 가수의 노래를 반주해서는 안 된다"며 공연을 제지당했고, 뉴욕의 한 호텔에서는 빌리 홀리데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문이 아닌 부엌문으로 출입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사실 빌리 홀리데이에게 이런 인종적 차별의 높은 벽을 느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초창기 공연했던 흑인 밴드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함께 공연할 때 디트로이트의 폭스 시어터(Fox Theater)의 지배인은 그녀보고 흑인치고는 너무 희다는 이유로 얼굴에 검댕을 칠하게 했고, 백인 밴드와 공연을 하게 되자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백인들과 함께 연주하기엔 너무 검다는 이유로 핑크 물감을 강제로 칠했다. 그래도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물론 관객들 중 일부 백인들이 그녀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그녀의 음악성에 공감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 순간부터 그녀는 뮤지션이 아니었고, 백인 악단에 우연히 끼어 든 '한 마리 검둥개'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인종차별의 감옥에 갇힌 그녀는 도시 뒷골목의 싸구려 식당조차 마음놓고 드나들 수 없었고, 같은 단원들끼리 함께 식사할 수도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단원들이 호텔 침대에 피곤에 지친 몸을 누일 때조차 그녀는 잠잘 곳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단원들이 아무리 그녀를 보호하고자 애써도 인종 차별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단원 내에서도 수석 단원이자 당시 인기 최고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주티 싱글턴(Zutty Singleton) 같은 이는 대놓고 빌리 홀리데이를 골탕 먹이기도 했다.
미국이라는 사회에 열린 기묘한 과일
그녀가 할렘의 뒷골목에서 노래하는 동안엔 아무도 그녀의 피부 색깔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백인들과 함께 공연을 시작하며 도심에 나타나자 백인들은 그녀를 한 마리 검은 짐승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연주 여행 동안 빌리 홀리데이의 마음이 크게 상처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빌리는 이때 받은 상처 때문에 간간이 마리화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 번씩 손을 대던 것이 여행기간이 길어지면서 마리화나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게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안게 된 빌리는 악단과 함께 라디오 전국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막상 방송이 시작되자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그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녀의 운명을 미리 예견시킬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1937년 2월 그녀가 가수로서 이름을 내기 시작하자 다시 연락이 오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부 순회 공연 도중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그녀의 아버지에게 병실을 내어준 병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 클라렌스 홀리데이는 병세가 악화돼 죽고 만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그녀 앞에 닥칠 운명이었고,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부터 인종차별의 장애물 앞에서 더욱 당당해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성은 더욱 깊어졌고, 1939년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노래 <기묘한 과일 Strange Fruit>을 부르게 된다. 이 노래는 루이스 앨런(Lewis Allen)의 시에 곡을 부친 것으로 흑인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뒤 나무에 매달려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었다.
할렘가의 가난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가수가 되었지만 인종차별의 잔인한 광경을 직접 목도한 빌리 홀리데이는 이 노래 <기묘한 과일>을 부를 때마다 더욱 혼신의 힘을 다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통해 인종차별의 잔인함에 대해 각성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루이스 앨런의 시에 곡을 부친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 God Bless the child> 같은 곡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 송이었다. (후일 존 바에즈가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 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며 함께 한 것처럼 보다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대운동에의 참여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이런 곡들을 분노를 억누르며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부름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가슴에 더욱 호소할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 맘껏 개화한 시기의 이 노래들은 빌리 홀리데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곡이 되었고, 그녀의 이런 노래들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관객들이라면 다른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를 막았다. 그녀는 '레이디데이'라는 그녀의 별칭답게 노래하는 동안 요란한 율동보다는 깊은 고뇌에 잠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본 관객들은 그녀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 노래 <기묘한 과일>은 릴리언 스미스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소설로 옮겨졌고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성과 그녀가 남긴 족적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흑인들의 목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흑인들이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목숨을 잃었고, 전쟁이 끝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1940년대에 이르자 빌리 홀리데이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 바야흐로 그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1944년 '에스콰이어 재즈 비평가상'을, 1946년 '올해의 메트로놈 보컬리스트상'을 받았다. 그녀의 공연 일정은 항상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대중은 그녀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런 인기 속에서도 빌리 홀리데이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을 자신만의 감정을 담아 부르고자 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어려서부터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귀담아 들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빼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어느 누구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단지 베시의 비음과 루이스의 필링을 원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 스타일은 어디서 발전했냐고 묻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만일 여기 어떤 곡이 있어 그것을 부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에 신경 쓰겠지만 나는 단지 느끼려 할뿐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도 뭔가를 느끼지 않겠는가? 생각, 편곡, 연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는 곡만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노래로 부를 수조차 없는 곡도 있었다.
사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해 우리는 흔히 재즈 보컬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그녀의 노래는 전형적인 재즈 보컬의 그것은 아니다. 물론 재즈 보컬은 이런 것이다 라고 딱히 정해진 바도 없고, 팝 음악의 많은 보컬들이 알게 모르게 재즈의 영향을 받아 형성돼 왔지만 그녀의 보컬은 블루스와 소울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라는 재즈사의 가장 거대한 위인에 대해서도 다분히 희화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음악이라는 거대한 산맥에서도 가장 높고 웅장하게 솟아있는 봉우리이다. 재즈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과 파급을 불러일으킨 루이 암스트롱에 비견할 만한 뮤지션은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에게 비견할 만한 인물을 들라면 찰리 파커(Chalie Parker), 듀크 엘링턴,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후일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고, 당시 루이 암스트롱에게 쏟아진 비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 비난들은 대개 그가 백인들 앞에서 어리숙한 흑인 광대 노예의 몸짓을 해 보인다는 것과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팝(Pop)적이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가 인정하고 있듯이 트럼펫 주자로 시작한 루이 암스트롱은 후에 로이 엘드리지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재즈 보컬의 기본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대에 펼쳐진 재즈의 화려한 성공은 대부분 그의 공덕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 홀리데이의 시대에 이르면 재즈는 단순히 크레올들의 정서나 목화밭의 목화 따는 체험이나 정서 이상의 것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이미 도시로 진출했으며 그들이 체험한 도시는 농장에서 목화를 따는 이상의 복잡한 정서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그런 당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라든가 배고픔이라는 낱말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캐딜락과 밍크 코트로 풀리지 않는 체험 - 그것으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두 낱말 안에 들어있다.
또한 빌리 홀리데이는 이렇게 가슴 저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필링으로 부르는 섬세하고 애절한 창법뿐만 아니라 마이크로폰(microphone)이 지닌 잠재력을 최초로 실현시킨 가수로서도 중요하다. 그녀는 보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랄 수 있는 마이크에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흘려 넣어야 하는지,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인지 가장 처음 알아차린, 그리고 가장 잘 알고 있는 가수였다. 그녀의 이런 마이크 창법은 그후 모든 장르의 보컬들에게 퍼져 나갔다.
가장 화려했던 순간 저버린 한 송이 치자꽃 빌리 홀리데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재즈(Jazz)라는 장르 자체는 그 출발이 어디에 있었건 간에 록큰롤(Rock & Roll)처럼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듀크 엘링턴 같은 이들은 살아 생전에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결코 재즈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저급한 용어로부터 출발한 재즈일지라도 재즈가 미국에 끼친 사회적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들이 짐승 이상의 그 무엇이고, 동시에 인간으로서 존경받을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문화적 영역에서 최초로 확인시켜주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빌리 홀리데이가 활동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백인들은 흑인들과 함께 식사할 권리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빌리 홀리데이는 백인 악단인 '아티 쇼 밴드'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1932년 무렵엔 'King of Swing' 베니 굿맨과의 교제, 1939년 오손 웰스와의 사랑 등 백인들과 교제를 멀리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그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이후 그녀는 1941년 캘리포니아의 한 나이트 클럽 매니저인 제임스 먼로를 만나 첫번째 결혼을 했지만 그는 바람둥이에 아편 중독자였다. 거기에 겹쳐 빌리 홀리데이의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빌리 홀리데이는 마약에 빠져들었고,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맨하탄의 개인요양원을 찾았지만 이 요양원측의 밀고로 마약단속반원에 체포되고 만다. 결국 빌리 홀리데이는 이때 마약상습복용자 명단에 올라 평생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만다. 그녀는 마약법 위반 혐의로 9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한다. 출옥 뒤에 가진 카네기 홀 컴백 공연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뉴욕시는 마약전과자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나이트클럽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새 남편 존 레비는 그녀의 수입을 갈취했고, 공연은 매번 성공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거의 없었다. 1950년 결국 레비와도 헤어진 그녀는 이듬해 루이스 맥케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재기에 성공했고, 1954년에는 유럽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마약수사국이었다.
그녀와 남편 맥케이는 불법무기,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당한다.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다서번째 형무소행이었다. 결국 얼마 안가 풀려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몰아닥친 불행으로 빌리 홀리데이는 정서불안과 음주, 마약 등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만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망가져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리해서 공연과 음반 취입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1959년 그녀는 쓰러졌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평생 마지막으로 체포된다.
그녀가 마약을 소지하고 있으리라는 추정만으로 이루어진 체포였다.
경찰은 다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전직 창녀, 마약상습복용자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니그로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들 역시 엘리노어 페이건이라는 본명으로 기재된 그녀의 환자 카드만 보고 환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마약에 찌들대로 찌든 채 병실에 누워있는 검둥이 여자에게 진정제만을 주사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이런 광경은 거의 매일 거듭되는 일상에 불과했다. 1959년 7월 17일. 불과 44세의 나이로 빌리 홀리데이는 숨졌다. 그녀의 진료 기록판에는"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운구 행렬에는 베니 굿맨, 테디 윌슨, 존 하모든 등이 뒤따랐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소리로 일컬어지는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영감에 넘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차별없는 자유를 염원했고, 그녀의 곡 해석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과 더불어 3대 여성 재즈 보컬이라고 일컫는 빌리 홀리데이. 사실, 가창력은 '노래하는 메트로놈'이라는 엘라 피츠제랄드를 능가할 수 없었고, 음색의 아름다움은 사라 본을 넘어설 수 없었지만 결국 이 모두를 능가해버린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활활 불태우고 떠나버렸다. 할렘가의 흑인으로 태어나 평생에 걸쳐 계속된 흑인으로서의 차별과 모욕을 피해 그녀는 죽음으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지금은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 없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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