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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orchid mom 2013. 3. 5. 11:20


 


故 유관순 열사 · 독립 운동가

1902年 12月 16日 ~ 1920年 9月 28日
서대문 형무소, 검거 당시 17세

 

故 유관순 열사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라곤 없는

상상 초월인 엄청난 고문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폭행.

그 것도,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당했었었다고 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었을지 … , … .
다가 성폭행은,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성적 · 정신적 피해도 뒤따르기 미련인데 … , … .


그리고 일본군들은, 故 유관순 열사의 머리에 콜타르를 바르곤 마치 가발을 벗기듯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릿 가죽을 통째로 벗겨냈었다고 한다.
피부 없는 생살 … , 얼마나 고통스러웠었을까 … ?

그리고 손톱을, 뻰치로 들었 놨다 하면서

서서히 뽑는 고문도 했었다고 한다.

열 손가락, 모두 다.

그리고 또 위와 호스를 연결시켜, 이물질이나 변 등을

위에 강제로 투입시키는 고문도 행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면도칼로, 귀와 코를 모두 깎아냈었다고 한다.

또한 밥에, 모래와 쇳가루 등을 넣어 먹였었다고도 한다.

짐승도 먹지 않는, 그것을 사람이 그 어찌 먹을 수 있었었는지 … , … ?

또 거꾸로 천장에 매달아 놓은 채, 코에 고춧가루나

후추를 들이붓는 고문도 실행됐었다고 한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 .

하지만 그것도 부족해,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나무상자긴 대못을

박아놓곤, 그 속에 故 유관순 열사를 강제로 접어 넣었었다고 한다.

그 좁은 나무상자 속에서 옴짝달싹도 못하는데, 대못까지 박아 놓았었다니 … , … ?

그 것도, 삼 일 씩이나 … , … .

그리고 더욱 더 가관이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

유관순 열사의 옷을 발가벗겨 세워 놓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것 뿐만도 아닌, 일본군들은 모든 독립 열사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故 유관순 열사의 옷을 발가벗겨 일본군들이 항상 지니고

있던 칼로 양쪽 가슴들을 모두 잘라냈었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많은 고문들이 이뤄졌었다고 한다.
발바닥 가죽 벗기기 · 입 찢기 · 전기고문 · 달군 인두로 허벅지 지지기 · 음부와
겨드랑이

털을 달군 쇠로 태워버리기 · 시뻘겋게 달궈진 쇠몽둥이로 등 후려치기 · 상체를

벗겨 채찍으로 등 후려치기 · 입에 호스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기 등등.

 

故 유관순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열사의 시신 인도를 요구했었다고 한다.

해서 결국 그 시체를 받긴 받았었는데 … , 그렇게

시신은 아주 끔찍하게 돼 있었다고 한다.

머리 · 몸통 · 사지가 따로따로 잘라져, 여섯 토막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 머리카락이 머리가죽째 뽑혀졌었을 뿐 아니라

손톱 · 발톱까지도 다 뽑혀져 있던 모습이었었다고 한다.

死因은, 바로 그런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年 10月 12日,

서대문 감옥소에서 18살인 참 어린 나이로 순국했었다.

1920年 10月 14日, 정동 예배당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유족 3형제와 동창생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됐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사의 무덤은, 도로 개설로 손실돼 그 근방 어디에 옮겨졌다가,

참 어처구니 없게도 그 조차 유실돼 버리고 말았었다고 한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출처 : 두엄자리
글쓴이 : 조각의to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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