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의 초상화
규원가(閨怨歌)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늙어버렸나
어릴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뭣하랴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나이 먹어감을 아쉬워함)
부모님이 이몸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며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는데
전생에 무슨 원망스러운 업보가 있었길래
방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들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듯 하였다.
(출가하던 지난 날을 회상함)
열 다섯, 열 여섯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타고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하였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하늘 마져 다 시기하여
봄 바람 가을 물 곧 세월이
베틀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님이 사랑 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
여러 사람이 떼지어 다니는 기방에 새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꽃 피고 새 울 때 정처 없이 나가서
호사스러운 행장을 하고서 어디에 머물러 노는고
집안에만 있어서 원근 지리를 모르는데 님의 소식은 어히야 알 수 있으랴
(기방에 출입하는 남편에 대한 경멸과 괴로움)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허난설헌의 글과 그림
겉으로는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님에 대한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님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한달 곧 서른 날이 이다지도 지루하랴
규방 앞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겨울밤 차고 찬 때 자국 섞여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긴 때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
봄날 온갖 꽃피고 버들잎이 돋아나는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네
가을 달 방에 들이 비추고 귀뜨라미 침상에서 울 때
긴 한숨 흘리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4계절 내내 끊임없는 님에 대한 그리움)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 할 것인가?
등불을 돌려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히 안아
벽련화곡을 시름에 겨워 타니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온 고고한 학이 울고 있는 듯
아름다운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 가락이 아직 남아있지만
연꽃 무늬가 있는 휘장을 친 방이 텅 비어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릴 것인가?
마음속이 굽이굽이 끊어 지누나
(거문고로 시름을 달래보지만 적막함은 애를끊나니)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님을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서 우는 벌레는
무슨 일이 원수가 되어 잠마져 깨우는가?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칠월 칠석 일년에 한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만나는데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장애물이 가리었기에
오고 가는 소식마져 그쳤는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님 가신 데를 바라보니
풀 이슬은 맺혀있고 저녁구름이 지나갈 때
수풀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서럽다.
세상에 서런 사람 많다고 하려니와
운명이 기구한 여자여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 말동 하여라
(잠을 자지 못하고 님을 기다리는 마음)
허난설헌의 생가. 이 집에서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씌여졌다.
그녀의 작품 규원가는
우리 국문학사(史)에 길이남을 위대한 작품이며
가사문학의 정수이고
규방문학의 진수이며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부모님 슬하에 곱게자라
시집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남자로 인해서 피었다 스러지는 여자의 한(恨)을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올리듯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숨소리마져 제대로 못내고 숨죽여 살아야하는
남성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기방(妓房)문학은 있고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 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허난설헌의 출현은 사건이었고
허난설헌의 작품은 쿠데타였다.
'규방에 심은 매화 몇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소상강 밤비에 댓잎소리가 들리는듯...'
400년 전에 살다 간
허난설헌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고
숨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디지털이 춤추는 이 시대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녀는 1563년(명종18년).
경상감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領袖)이던 허엽(許曄)의 둘째딸로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許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그녀의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그녀의 동생이다
생가 안채 뜰. 치마 자락 여미고 댕기머리 휘날리며 뛰어 놀던 허초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문장이었다.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가
선녀가 살고있다는 상상속의 달세계의 궁전이라는 광한전을 생각하고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은
그 당시 문인 재사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생가 솔밭터. 얼마나 맑은 향기였기에 그토록 고운 시를 뽑아 올릴 수 있었을까
이러한 그녀도 아직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명문가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불행을 잉태하게 된다.
남편 김성립은 당대의 5대 문장가이며 그 집안 출신인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남편의 학대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이
그녀의 시상(詩想)을 북돋았는지 모른다.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을 재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 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못 속에 연꽃만 맥없이 지고있네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강릉 생가를 다녀오면서 추려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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