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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수증 /최영미

orchid mom 2013. 6. 18. 11:42

 

     

     

     

     

     영수증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당신이 불러주지 않아도
    이렇게 와 섰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지막 셈을 마쳤으니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시죠

    제 것이 아닌 시간도 가끔씩 넘보며 훔치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한세월 놀다 갑니다

    지상에서 제가 일용한 양식
    일용한 몸, 일용한 이름
    날마다의 고독과 욕망과 죄, 한꺼번에 돌려드리니
    부디 거둬주시죠

    당신이 보여주신 세상이 제 맘에 들지 않아
    한번 바꿔보려 했습니다

    그 듯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지어내고 엮으신 하루가 밤과 낮 나쥐듯
    취했을 때와 깰 때
    세상은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앞으로 보여주실 세상은 또 얼마나 놀라울가요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뚝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 끝에 채이면
    쩔렁!하고 가끔씩 소리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출처 : 두엄자리
글쓴이 : 조각의to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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