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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가 된 편지들 / 김용택

orchid mom 2013. 12. 10. 09:30

 

 

 

 

 

 

 

 

시가 된 편지들 / 김용택

 

 

어느 해 겨울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와 어디를 갔다가 전주에서 헤어지고 나 혼자 막차를 타고

 시골로 왔다. 늦은 시간이었고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밖의 겨울

들판 풍경은 아늑하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했다. 나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늘 내리는 차부4에 도착했을 때는 10시쯤이었다. 차부에서 집까지는 작은 들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나는 늘 그 작은 들의 달빛이 좋았다. 달빛을 가만가만 밟으며 달빛

아래 마을이며 불 꺼진 낮은 지붕이며 검은 산과 들을 천천히 보았다. 오만 가지 생각들이 떠올

랐다가 물소리 따라 가 버리고 달빛에 부서졌다.

나는 집에 와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튿날 부쳤다. 편지를 부치고 나서 생각하니 그 편지글이

다시 보고 싶었다. 잘 쓴 글 같았다. 시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어제

 보낸 편지를 다시 돌려 달라고.

다시 온 편지로 나는 시를 썼다.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겨울, 사랑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 시를 그 여인에게 보냈다. 이 여인과는 결국

 헤어졌다. 지금도 나는 그 밤의 달빛과 강과 작은 들과 보리 잎들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다.

 

 

 

 

 

 

 

 

 

 


                                            

 

출처 : 두엄자리
글쓴이 : 조각의to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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