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된 편지들 / 김용택
어느 해 겨울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와 어디를 갔다가 전주에서 헤어지고 나 혼자 막차를 타고
시골로 왔다. 늦은 시간이었고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밖의 겨울
들판 풍경은 아늑하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했다. 나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늘 내리는 차부4에 도착했을 때는 10시쯤이었다. 차부에서 집까지는 작은 들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나는 늘 그 작은 들의 달빛이 좋았다. 달빛을 가만가만 밟으며 달빛
아래 마을이며 불 꺼진 낮은 지붕이며 검은 산과 들을 천천히 보았다. 오만 가지 생각들이 떠올
랐다가 물소리 따라 가 버리고 달빛에 부서졌다.
나는 집에 와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튿날 부쳤다. 편지를 부치고 나서 생각하니 그 편지글이
다시 보고 싶었다. 잘 쓴 글 같았다. 시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어제
보낸 편지를 다시 돌려 달라고.
다시 온 편지로 나는 시를 썼다.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 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겨울, 사랑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 시를 그 여인에게 보냈다. 이 여인과는 결국
헤어졌다. 지금도 나는 그 밤의 달빛과 강과 작은 들과 보리 잎들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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