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스크랩] 참, 멀다 / 나호열

orchid mom 2013. 5. 14. 12:58

 

     

     

     

    참, 멀다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벌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출처 : 두엄자리
글쓴이 : 조각의to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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