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다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박영, 하늘로 가는 길
참으로 슬퍼할 일 너무 많아도
이제 울지 않기로 하자
한 세상 울다 보면
어찌 눈물이야 부족할 리 있겠느냐만
이제 가만가만 가슴 다독이며
하늘 끝 맴돌다 온 바람소리에
눈 멀기로 하자.
이 가을.
자신에게 너무 혹독하게
다그치지 않기로 하자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기로 하자.
이정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한용운,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 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신달자, 백치 애인
나에겐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 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 지를, 그리워하는 지를 그는 모른다.
별 볼 일 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서 있는 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다방에서 다방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 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 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내게 한 마디 말도 해오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나를 떠난 그 어디서나 총명하고 과감하면서
내게 와서 너는 백치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백치인 너를 사랑하며 바보인 너를 좋아한다.
우리가 불로 만나 타오를 수 없고 물로 만나 합쳐 흐를 수 없을 때
너는 차라리 백치임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너는 그 것을 알 것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그 허허로운 결과를 알고 먼저 네 마음을 돌처럼 굳혔는가.
그 돌같은 침묵 속으로 네 감정을 가두어 두면서
스스로 너는 백치가 되어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가.
바보 애인아,
세상은 날로 적막하여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큰 과업처럼
야단스럽고 또한 그처럼도 못하는 자는 절로 바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래, 바보가 되자.
바보인 너를 내가 사랑하고 백치인 네 영혼에 나를 묻으리라.
바보 애인아,
거듭 부르는 나의 백치애인아.
잠에 빠지고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부르며 잠에서 깬
그 첫 여명의 밝음을 비벼 집고 너의 환상을 쫓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너는 너무 모른다.
정말이지 너는 바보,
백치인가.
그대 백치이다.
우리는 바보가 되자.
이 세상에 아주 제일가는 바보가 되어서 모르는 척 하며 살자.
기억 속의 사람은 되지 말며
잊혀진 사람도 되지 말며
이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자.
우리가 언제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언제 마주 앉아 차를 마셨던가.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는
아무 상관 없는 행인처럼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거다.
바보 애인아,
아무 상관 없는 그런 관계에선 우리에게 결코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애인이다.
백치 애인이다.
윤성학, 마중물
참 어이없기도 해라
마중물, 마중물이라니요
물 한 바가지 부어서
열 길 물 속
한 길 당신 속까지 마중 갔다가
함께 뒤섞이는 거래요
올라온 물과 섞이면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그 한 바가지의 안타까움에까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나요
철렁하기도 해라
참 어이없게도.
Acoustic Cafe - Long Long Ago